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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송이갑 블로그
위기 극복과정에서 탄생한 이름,태화강 본문
| [역사속의 울산, 울산사람들]위기에 처한 신라민심 불력으로 집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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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기 극복과정에서 탄생한 이름, 태화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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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신라 지배층에 끼친 충격은 정말 컸다. 백제에 병합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 김유신(金庾信)을 오늘날 경산지역인 압량주의 군주(軍主)로 파견한 것을 볼 때, 신라의 서부 경계는 서쪽으로 크게 밀려났다. 또한 고구려도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의 서해 항구인 당항성(黨項城, 경기 화성)을 공격했다. 삼국시대 말기,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결국 동아시아 국제전 성격으로 확대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각 나라가 처하고 있던 정치적 갈등이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고구려에서는 642년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그는 영류왕(榮留王, 618~642)을 몰아내고 보장왕(寶藏王, 642~668)을 내세워 권력을 한 손에 넣게 되었다. 이때 귀족세력 상당수가 숙청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집권층 내부에 갈등이 매우 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백제도 의자왕이 즉위하여, 왕족·귀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한 것을 볼 때, 내부적으로 갈등이 야기되고 있었다. 신라의 경우는 여왕의 즉위를 못마땅해 하는 귀족이 있었고, 왕권에 도전하는 자도 생겨나고 있었다. 이렇게 642년 무렵 삼국은 모두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이것이 외부로 표출될 경우, 연쇄 반응을 일으켜 앞날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불을 지핀 사람이 의자왕이었다. 642년 의자왕의 침공으로 위기상황에 빠진 신라는 어떻게 위기를 돌파해 낼지 고민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도 이 때부터라 할 수 있다. 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급박한 사정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자장(慈藏, 590~658)의 귀국을 간곡히 요청했다. 당에 유학중이던 자장은 귀족출신으로, 당 태종(太宗, 627~649)에게까지 찬사를 받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 인물이라면 위기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을 수 있고, 당과의 군사 외교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적임자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윽고 자장은 643년 석가모니 진신사리와 불경·불상 등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라 신라로 돌아오게 된다. <삼국유사>를 통해 보면, 이때 자장은 여왕의 권위를 높이는 논리를 펴고, 부처의 힘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이를 통해 난국을 타개해 나가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우선 그는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신라 왕실과 석가모니 집안이 같은 가문이란 점을 부각시켰다. 즉 “내가 당의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났는데, 신라 왕실은 석가모니 가문인 찰리종(刹利種, 크샤트리아)으로, 부처와 특별한 인연이 있으며 다른 족속과 다르다고 했다”는 점을 역설했다. 말하자면, 신라 왕실은 위대한 가문으로 존귀한 존재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또한 당의 태화지(太和池)에서 신인(神人, 龍)에게 들었던 말을 언급하며, 황룡사(皇龍寺)에 9층 목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항복해 오고, 나라가 태평할 것이라 했다는 것이다. 여왕은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건립에 착수하여 645년 거대한 목탑을 완공할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국력을 집중해야 하는 대역사였다. 이렇게 불력을 통해 민심 수습에 이바지한 이후, 자장은 당나라 복식과 연호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당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려는 조치였거니와, 결국 나당 군사동맹을 이끌어내는데 기여했다. 그런데, 앞서 자장은 귀국을 서둘렀지만, 서해 항구가 포위된 상태였기에 바닷길을 통해 울산 쪽으로 들어왔던 것 같다. 그의 민심 수습 노력은 울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장은 태화지에서 만났던 용이 신라 왕경 남쪽에 절을 지어주면 은덕에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다는 말을 제시하면서 사찰을 지었다. 이 절이 바로 태화사(太和寺)인데, 이곳 탑에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보관했다. 진신사리를 보관할 정도라면 태화사의 격은 대단히 높았다고 할 수 있다. 태화사 앞을 흐르는 강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머물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그 중심지는 황룡연·용금소라 불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용이 태화강에 머물며 신라를 든든하게 지켜준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태화강이 있는 한 신라 사람들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울산 역사와 함께 흘러온 태화강의 이름은 신라가 가장 큰 위기에 처했을 때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이를 주목하면, 태화강은 일반적인 강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한국의 경제 성장을 보여주는 ‘태화강의 기적’과도 잘 연결되는 듯하다.
경상일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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