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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의 역사>
구(舊) 시가지 즉 옛 읍기(邑基)의 앞을 흐르는 강을 태화강이라 불러오고 있다.
예로부터 이 물로 농사짓고 식수로 하며 살아왔으니, 태화강을 울산 사람의 젓줄이라 했던 것이다.
아주 옛날 우리겨레가 삶을 찾아 남(南)을 항해 내려올 때 남을 앞이라 하고, 뒤를북(北)이라 불렀다. 조선 중종 때 만든‘훈몽자회’에‘南을 앞남’‘北을 뒷북’이라 풀이한 것도 그 것을 말해준다. 울산도 뒤에 산을 등지고 앞에 강을 끼고 터를 잡았으니 강 이름을 앞강(南江)이라 불러오다가 신라 때 한 역사적 연유 때문에 태화강(太和江)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전설을 이미 아시는 분이 많겠지만 잠시 집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제자들을 데리고 불교문화의 수입차 당(唐)나라에 유학갔는데 산동성(山東省)의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고,그 아래 있는 태화지(太和池) 못가에서 신인(神人) 즉 용(龍)을 만나는데 용이 말하기를「황룡사의 호국룡은 나의 맏아들이오거기에도 9층탑을 세우면 구한(九韓)이조공해 오고 나라가 편
안할 것이오 그리고 경기 남쪽 땅에 절을 지어 나의 복을 빌어주면 나도 또한 그 은덕을 갚으리다」하고옥을 비치고 사라졌다 한다. 자장 일행은 오랜 수행을 마치고 불사리·불경 등 많은 선물을 얻어 배를 타고 서해(西海)를 건너 오게 되었는데 당시의 항해장비와 기술로서는 생사(生死)가 반반(半半)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장(慈藏)일행은 태화지용의 가호(加護)를 굳게 믿고 무사히 대해를 건너 우리 땅에 도착하니 그곳이 아곡현(阿谷縣, 울산)의 사포(絲浦)이니 지금의 태화강 용금소였다. 그래서 자장일행은 생명의 은용(恩龍)이요 나라를 지키겠다는 이 호국용을 위해 강물이 가장 깊은 물 속에 살게하니 그곳 이름이‘용큰소’니 한자(漢子)음을 표기하니‘용금(龍黔)소’요,또‘한용소’라고도 불렀는데 한자 표기로는‘황룡연(黃龍淵)’이라고 기록해 왔다.
그리고 용의 소원에 따라 용금소의 위 언덕의 안쪽에 절을 지어 용의 복을 빌어주니 이름이 태화사요 강언덕에 종루를 세우니 태화루라 하고 강이름 또한 태화강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자장일행이 아곡현(울산)의 사포(황룡연)에도착한 해가 선덕여왕 12년(643)이니 지금부터 1362년 전의 일인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강(江) 전체를 태화강이라 부르고 있지만, 고종 8년( 1 8 7 1 )에 만든「영남읍지」울산지도를 보면 용금소가 있는 일대는 태화강(太和江)이라 기록하고 그 하류쪽은 앞강(前江)이라는 이름이 있음을 보아, 옛날엔 용금소와 그 일대는 태화강이라 부르고 성남·옥교동 앞쪽은 옛이름 그대로 앞강이라 불러온 것이라 생각된다.
태화강은 그 시원(始原)이 멀고 또 여러곳의 물줄기를 받아오지만 여기서 그 얘기는 피하기로 하고, 삼호(三湖)쪽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어김없이 남산십이봉(南山十二峰)의 발치를 씻으면서 흘러가다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크게 범람하여 북안(北岸)의 새터(新基)마을 앞으로 흘러간 적이 있었다. 그 때 흔적은 요즘와선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일제 때는 이쪽으로 흐르는 강물 속에 사람들이 멱을 감고 낚시질도 했다고 한다.
이곳 고로(古老)들의 말에 의하면 이 강물 속에 3층의 태화석탑이 꼿꼿이 선채로 잠겨있는데 자맥질해서 한 길쯤 내려가면 꼭지를 만질 수 있고세길쯤 내려가야 밑둥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흔적을 감춘 태화사 석탑이 바로 이것이다’생각되어 필자는 발굴작업을 시도한 적도 있다. 이렇게 범람했던 옛강과 본강 사이에 있는 모래섬에는 예부터 홍수를 막기 위해 대밭이있었다.
이를 오산대밭이라고 하는데 읍지에 의하면‘내요산(內鰲山)은 태화나루의 서쪽 수리(數里)에 있는데 작은 언덕이 강물에 임(臨)해 있어 경치가 오묘하여 만회정(晩悔亭)이란 정자가 있다. 부사 박취문이 세운 것이다. 정자 앞에 수묘(數畝, 수백평방미터)의 대숲이 있다’고 했는데 예부터 경치가 뛰어나 시인 묵객들이 찾는 곳이었다.
그리고 용금소 바로 위에 태화루가 있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거니와 경관의뛰어남이 나라 안에 널리 알려졌다. 977년고려의 성종이 경주에 납시었다가 흥례부(울산)의 태화루를 찾아 주연을 베풀었는데 강에서 잡아온 큰 생선을 드시고 병환이 나서 환궁후 별세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실려있다.
또 읍지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떤 고관이 태화루에서 주연을 열고 잔을 돌리던 중 은잔(銀盞)을 강물에 빠트렸다. 어부에게 자맥질하여 찾아오게 했더니 한참 후에야 잔을 들고나와 이르기를 ‘강속의 북쪽으로 굴(屈)이 있어 일마작쯤 가면 궁전이 있습니다. 위의를 갖춘왕이 말하기를 위쪽의 세상 사람들이 소란한지라 이 은잔을 빼앗아 경고하는 것이니 가서 고하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말하기를‘그 굴은 백양사 북쪽까지 통해 있는 것같았습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곳 강변사람들은 어떤 때는 강물 위에 붉은 기름같은 것이 비단을 끌고 가듯 떠내려 가는것을 볼 때가 있는데 이는 용금소 암용의 달거리라고 말하기도 한다고 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용금소의 태화용이 태화사가 없어진 후에는 백양사까지 굴 속을 통해 올라가서 대신 빌어주는 축복을 받고 돌아온다는 이곳 민간의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기록한 이야기로 본다.
지금 태화교가 있는 근방에 옛날엔 태화나루가 있어서 강의 남쪽 사람들의 발을이어주는 구실을 해주었다. 그래서 그 강 남쪽 마을을‘나루건너’또는‘물건네’라 불렀다. 한자(漢子)로 표기해서 월진리(越津里) 또는 월진평리(越津坪里) 라 불렀는데 나루 진(津)자가 뱃사공을 연상케하고 상스럽게 여겨 진(津)자를 빼고, 건널 월(越)자도 달 월(月)자로
바꾸어 월평리(月坪里)라 고치게 된 것이라 한다.
지금 신정시장을 처음에 월평시장이라 부른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나룻배가 다니던 바로 옆에는 옛날에도 다리가 있었는데 이것을 태화석교(太和石橋)라 불렀다고 한다. 영조 때의 읍지에 ‘태화석교는 관부의 서쪽 5리에 있는데 숙종 종묘년(1687) 아전 김세중이 돌을 캐어서 다리를 놓았다 그 후 31년이 지난 정유년(1717)에 풍수가 보고 읍기(邑基)에 해가 된다고 해서 헐어 없앴다’고 했다. 또 다른 읍지에 ‘ 무지개다리(虹橋)는 태화강 상류에 있는데 참봉 이만령이 구축한 것으로 후인의 비가 있다’고 했다.
무지개다리(虹橋) 또한 태화석교가 있던 자리로 추정되며 그 후손이 세운 돌비가 태화교 북쪽 교두에 지금도 다행이 남아있다. 훼손된곳이 많기 때문에 간추려 내용을 적어보면 앞면엔‘참봉 이공 만령(李公萬齡) 영세불망비’라 하고는 …옛 태화루 곁에 강이좁고 물이 합수되는 곳에 강물을 건너기가 어려우므로 백성들을 위해 무지개 다리를 놓아 통행할 수 있게 한다 … 공의 증손 정필 등이 비석에 새겨 강가 즉 무지개 다리 앞쪽에 새운다.
함풍 1 0 년 (1860) 10월’이라 했는데 비문 등을 미루어 보아 태화석교가 철거된 지 10년후에 무지개 다리를 세운 것같다.
용금소의 남쪽은 은월봉이 솟아있고 산기슭 동쪽엔 나지막한 언덕이 있었는데 겨울에도 꽃들이 피는 곳이라 해서 장춘오(藏春烏)라 불렀다. 지금은 없어지고 그옆에는 이휴정(二休亭)이 우뚝 서 있다. 이휴정은 현정 3년(1662)에 성균생원 이동영이 세운 정자로 1940년 객사의 남종루였던 즉 태화루의 체목을 구입하여 개축했는데 금년에 또 개축했다. 태화루의 현판도 여기에 소장되어 있다.
말머리를 다시 강북으로 돌려 우정삼거리 쪽으로 내려가다가 길 옆에 보면 송도(松滔) 효자의 정려각(旌閭閣)과 비석이있다. 송도라 하면 울산에선 첫 손가락 꼽히고 세종 때 중국 명나라까지 알려진 이름 높은 효자다. 그의 정려비문을 초략해보면‘효자 성균생원 송도의 여비(孝子成均生員宋滔之閭碑) 공은 연안인(延安人)으로 본디 학문과덕행이 있어 부모를 정성으로 극진히 섬겼다 … 어머니는 일찍이눈병을 알아 장님이 되었는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는 소문을 듣고 놀라고 기뻐서 두 눈을 떴다 … 중국의 조정에까지알려 정려를 표창하고 돌비도 있었는데 옛것은 부의 동쪽 백련암(효문동)에 있던것을 정사년 봄에 부의 서쪽 강정리(현재 자리) 연못가에 옮겨 세웠다’고 하는 등 많은 전설이 전해오지만 생략키로 한다.
다음은 강둑을 살펴보자. 지금 둑은 아주 넓어 많은 차가 왕래하고 있지만 지난날엔 폭도 아주 좁아 소달구지 하나가 겨우 다닐 정도였고 사람의 왕래도 거의 볼 수가없었다. 그러나 여름철 저녁이 되면 납량하는 사람들로 둑을 메우고 거적을 깔고아예 자는 사람도 있었다. 북쪽으로 잠시눈을 돌리면 옛날 부치(府治)의 자리엔 수많은 관아의 건물이
있었다고 읍지에 기록되어 있지만 왜정 때 거의 없어지고 군청,경찰서, 우체국 등 관공서로 쓰다가 지금은 새로 만든 동원이 옛모습을 전해주고있다.
옥교동 앞 태화강에 신식 교량으로 처음생긴 것이 울산교(蔚山橋)인데 1934년에 콘트리트로 만든 것으로 높고 넓고 튼튼하여 다니는 사람마다 놀라고 좋아했다. 이보다 조금 하류엔 강 속에 모래 섬이 있었는데 이 섬에서 안쪽으로 놓은 나무다리를 ‘안철다리’라 불렀고, 섬에서 삼신쪽으로의 다리를‘바깥철다리’라 했다. 둘을 합해서‘성남교’라 불러
왔는데 옛날엔 이 다리를 건너야 관청은 물론 읍내장에 다녔기 때문에 대현, 청량, 온산은 물론 신정, 달동사람까지 다녀야 하는 요긴한 다리였다.
하지만 편리한 울산교가 생긴 후에는 자연철폐되고 말았다.옛날엔 이곳 강물은 수심도 깊어 중나루(中津) 또는 주나 (注津)라는 나룻배도 있었다지만 훗날 없어지고 그 일대는 소금을 비롯 생선, 땔나무 등을 실은 장삿배가일정(日政) 까지도 있었다.
다시 말머리를 돌려 임란(壬亂) 때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이 태화강에서 일어난 전투는 여러 문헌에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많은 이야기를 여기 적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한가지 기록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왜장 수길(秀吉)이 죽고 적군이 퇴각할 때였다. 병사 김응서는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팔공산 초목이 힘찬 바람에 나부끼고, 눈물로 잡은 칼날엔 충성심이 번쩍인다. 태화강도 목이 매어 한없이 흘러가니, 군령받든 그 공(功)들은 잊혀지지 않으리’이 때 통제사 이운용이 화답한 노래중에‘태화강 넓은 물이 피로서 물들이고…’이란 노랜 구절이 있음을 보아 그 옛날 태화강에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상상하고도 남을 만하다.
그리고 학성공원 뒷산을 신두산(神頭山)이라 불렀는데 옛날 계변천신(戒邊天神)이 학을 타고 내려왔다는 전설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 쌓은 성을 신학성 또는 계변성이라 불러오고 있다. 이산 뒤쪽에 병영가는 길을 계변고개라 부르는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현 학성공원산은 본래는 필봉(筆鋒)이라 불렀는데 정유재란(丁酉再亂)때왜장 가등청정이 부하장수 천야행장 등을 시켜 읍성을 헐어 여기에 왜성을 축성하였다. 흔히 도산성(島山城)이라고 불렀는데가장 치열한 전투가 여기서 벌어졌다.
1597년 12월 23일부터 익년 정월 4일까지 조명연합군이 성을 포위하니 왜군은 양식과 물이 떨어져 말오줌을 받아 마시고 성 밖의 우물(반구동 큰새미)을 기르러 나왔다가 생포된 자가 많았다. 그 때 우물이 아직도 남아있거니와 당시 위기일발에 처한 왜장 가등은 성이 함락되기 전에 함께 할복자살 하자고 재장을 불렀으나 재장이 응하지 않고 버티던 중에 왜의 원군이 속속 도착함으로 포위망을 풀게되니 절통한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공원산 동쪽 서부리(지금의 반구동)에 살던 이응춘(李應春)이 반구정이란 정자에서 각처의 의병장 67명과 구강회맹(鷗江會盟)을 한 곳 또한 이 곳이었다고한다. 태화강의 남쪽 넓은 들이 마단들이다. 일제가 1928년에 울산 비행장을 여기에 설치하니 부지가 6만평이며 경성→ 울산→후쿠오카를 잇는 우편화물의 수송이 주목적이있다. 그러다가 왜정말인 1 9 4 3년경 군사비행장으로 확장할 때 삼산동의 세봉우리(일명 오산鰲山)를 깎아 없앤 것이다. 8.15광복이 되자 다시 논으로 개간하여 삼산들과 함께 휘넓기만 하던 들판이 이젠 산업역군의 인구증가로 인해 빼곡한 틈새없이 건물의 숲을 이룩하고 있다.
태화강은 신도시와 구도시 사이를 누비며 내황마을 앞에서 동천강물을 받아 안고 오른쪽엔 돛질의 업체를 끼고 왼편으론 양정 자동차공장을 바라보면서 울산항을 빠져 나간다. 항구의 양편에는 수없이 많은산업체가 있고 바다엔 산더미같은 배가 수출입 물동량을 나르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일러 태화강의 기적이라고 불렀고 그래서 강물은 산업수도의 맥박인냥 오늘도 쉬지 않고 흐르고 있다 (출처 : 태화강 보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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