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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송이갑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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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 절경에 묵은 시름도 씻었더라

파랑새/송이갑 2008. 2. 29. 08:17

[울산의 랜드마크 태화강]태화강 절경에 묵은 시름도 씻었더라
문화·예술과 풍류가 흐르는 태화강
[2008.02.27 22:45]

신라왕실의 로맨스와 화랑의 수련 기록, 그리고 묵객들의 명승을 노래한 문학작품의 무대가 됐던 태화강의 상류 대곡천은 천전리각석과 반구대를 품고 있다. 경상일보자료사진
김유신등 신라왕실·귀족 내왕하며 문화의 꽃 피운 곳
대곡천변 반구대 빼어난 경승 시인 묵객 발길 유혹도
울주8경 태화루 경치 기록한 수많은 문학작품 전해져



태화강 유역이 역사시대 이래 숱한 영웅을 낳거나, 영웅 탄생의 무대가 됐다. 처용설화를 낳은 신라 헌강왕(~886년),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신라 진흥왕(540∼576년), 고려 성종 등 3명의 왕이 울산과 태화강을 거쳐갔다.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무수히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태화강 수계에서 나거나 생활하면서 지역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는 토대를 쌓았다.

태화강의 최장거리 발원지 탑골샘을 품은 울주군 두서면 백운산(옛 열박산)은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의 굳은 의지를 하늘에 고하며 심신을 수련한 곳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진평왕(건복) 34년(612년)에 공이 장한 뜻을 품고 보검을 차고 홀로 열박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기도했다'고 전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열박산에 김유신의 기도처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젊은 화랑 김유신과 진골 출신의 김춘추(태종무열왕)가 처음 만나 인연을 맺은 곳도 이곳 열박산이다.

이처럼 신라 왕실과 귀족들의 울산 방문 기록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19세기까지 두동과 두서 일대가 경주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363~419년)도 태화강 상류에서 난 울산인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울산울주지>(1970) 고적조에 '월평제(月坪堤)는 치산 아래에 있으니 박제상이 살았던 곳이다'고 해 박제상의 거주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중기 이의립 문집 <구충당선생문집>에 실린 한시에도 '박공은 (치술)령 북쪽 몇 궁(弓) 쯤 되는 곳의 둑가에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박제상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실려있다. 이의립(1621~1694년)의 바로 달천철산을 재발견한 인물이다.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계곡에는 신라 진흥왕의 아버지이자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 갈문왕의 로맨스를 담은 기록이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에 명문(원명과 추명)으로 남아있다.

원명은 진흥왕의 아버지 사부지(徙夫知) 갈문왕과 사촌 누이(법흥왕 딸 지소)가 법흥왕 12년(525년)에 이 곳에 놀러와 유람한 기념으로 새겼고, 추명은 사부지 갈문왕 일행이 처음 이곳을 찾은지 14년 후에 아들 진흥을 데리고 와서 놀았다는 기록이다.

대곡천변의 반구대는 시인 묵객들이 고헌산, 화장산, 파래소폭포 등과 함께 언양팔경(彦陽八景) 중 하나로 빼어난 경승을 자랑했다. 이미 신라시대 원효대사(617~ 686년)는 이곳 반구대 부근 반고사에서 저술활동을 했다.

고려 말에는 포은 정몽주가 언양 요도(현 어음리)에 귀양와 반구대와 작천정에 들러 시를 지으며 시름을 달랬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같은 고명한 학자들도 반구대에서 경관을 즐기며 문풍(文風)을 진작시키고 명시를 남겼다.

이 곳 반구서원(언양읍 대곡리)에서는 매년 음력 3월 중정일에 포은, 회재, 한강 등 3현을 봉사(奉祀)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조선 말 고종 때는 언양의 송찬규(1838∼1910년)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포은대영모사(圃隱臺永慕辭)라는 시문을 지어 반구대에 새겨 놓았다.

태화강 본류 상류인 언양은 고려시대 거란군의 침입을 저지한 김취려(~1234년) 장군의 고향이다. 언양읍 화장산 기슭에는 위열공 김취려 장군의 묘(지방기념물 제7호)가 남아 있다. 태화강 중류인 삼동면 둔기리에는 시해된 단종을 염장한 영월호장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원강서원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울산과 태화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해 전국에 확산시킨 일등공신을 꼽는다면, 단연 고려 말 울산에 유배 온 설곡 정포(1309∼1345년)다. 정포는 울산의 경승지를 두루 유람하면서 울주팔경을 시로 남겼다.

이 가운데 남산 은월봉, 은월봉과 황룡연 사이의 언덕인 장춘오, 황용연 위의 태화루, 무룡산 기슭에 있는 흰 바위 전설의 백련암, 태화사 앞의 평원각, 삼산의 벽파정 등 6경이 태화강의 아름다움을 담은 내용이다.

울주8경의 하나인 태화루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태화사 창건 당시 또는 신라 말에 지어졌다는 학설로 나뉜다. 분명한 것은 왕과 유명 문인들이 태화강 태화루를 찾아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무수한 문학작품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 태화루를 가장 먼저 방문한 역사적 인물은 고려 성종이다. 성종은 997년 8월 친히 태화루를 찾아 신하들에게 잔치를 배풀었다. 고려 명종 때 한림학사 김극기(1148~1209년)도 <태화루시서>를, 고려 말·조선 초의 학자 권근(1352∼1409년)은 자신의 <양촌집>에 <태화루기>를 남겼다.

조선시대 서거정(1420~1488년)은 <태화루 중신기>에서 태화루 경치를 두고 '층층으로 언덕과 끊어진 절벽위에 높다랗게 서서 푸른 물결을 내려다 보고 있다'고 표현했다. 이후에도 조선 초 경상좌도 병마평사를 지낸 김종직(1431~1492년)을 비롯해 김안국(1478~1543년), 송순(1493~1582년), 울산부사를 지낸 권상일(1679~1759년)과 윤지태(1744~1746년) 등 수많은 문인과 고관대작들이 태화루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다.

또 현재 태화루 평원각, 벽파정, 태화루 남쪽에 겨울에도 꽃과 풀, 해죽이 무성해 '봄을 감추는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장춘오(藏春塢) 등은 사라지고 '달 그림자가 봉우리에 숨는다'는 은월봉隱月峰)만 남아있다. 현재 이휴정에는 태화루 현판이 보관돼 있다.

울산 출신인 고려 말·조선 초의 무신 충숙공 이예(1373~1445년)는 외교관·통신사로 일본에 40여 차례나 왕래하면서 포로 송환에 큰 공을 세웠다. 또 이종무를 도와 대마도 왜적 소탕에도 공을 세우기도 했다.

충숙공의 이 같은 노력은 100년 뒤 임진왜란 발발로 수포로 돌아간다. 태화강 하류 학성은 16세기 한·일 양국 영웅들간 국가의 운명을 건 격전이 벌어진 역사적인 장소다. 정유재란 때 가토 기요마사(1562~1611년)는 북진이 막히자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 학성을 쌓은 뒤 1597년(선조 30) 12월 조선 관군의 수장 권율과 최후의 격전을 치렀다.

태화강 하류 울산 장생포항은 반구대 암각화와 고래축제의 근간이 된 고래와 관련한 해양문화를 낳았다. 이밖에 일제 시대 김홍조 옹은 학성공원과 작천정을 만드는데 기여를 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울산시 문화예술과 신형석 학예사는 "태화강은 반구대 암각화에서 장생포까지 불교와 유교 등 수천년 역사 속에 다양한 문화상을 가진 소중한 하천"이라면서 "태화강과 관련한 종합적인 연구를 통해 외지인들이 울산을 방문하지 않더라도 태화강의 매력을 느낄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창식기자 goodgo@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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